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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보화리] 그림같은 풍경 속 석조이불입상 본문

남산 그리고 마애불

[정읍 보화리] 그림같은 풍경 속 석조이불입상

lotusgm 2015. 11. 15. 15:02

 

 

 

 

 

 2015년 11월 10일 예정보다 이틀 미뤄진 마애불순례.

아직은 남아있는 가을의 끝자락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떠난 길

내내 안개가 자욱하고 해가 나와줄 것 같지않은 가을 하늘 눈치를 보면서,

전라도지만 요즘은 짧아지는 해를 탓할 필요도 없이 3시간 반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들 가운데로 난 길을 달려 도저히 저 좁은 길로 들어설 수는 있을까?

걱정도 잠시 눈 질끈 감았다 뜨니 들판에 왠 번듯한 주차장?

 

 

 

 

멀리 특이한 풍경 속 작은 전각이 보이고 주변으로 먼저 도착한 대구와 대전의 보살님들 무리도 보였다.

자연을 그림과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한폭의 그림이다.

 

 

 

 

 


 

아직도 남아있는 구절초 더미가 예쁜 풍경을 만드는 데 한몫한다.

 

 

 

 

 


 

 



 

 

 


 

 

석불이 항상 바라보고 있는 쪽을 나도 한번 바라보고.

 

 

 

 

묘허큰스님의 간절한 축원.

 

 

 

 

우리나라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느냐..공식적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인데,그보다는 훨씬 먼저

불교가 들어왔어요. 제주도에는(주를 '탐라'라 그러죠?) 탐라국이라고 있었어요. 부처님 당시에 16 아라한 중에

제7대 가리가존자가 어디서 상주설법을 하고 수행을 했느냐..'탐몰라주'..그 곳이 바로 '탐라'예요. 지금 제주입니다.

그래서 제주도는 아라한도량 입니다.한라산 역시 아라한들의 상주도량이라고 하고, 영실기암이라는 바위가

원래는 500아라한 이었다가 이조때 와서 500장군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된 이외에 다양한 전래루트가 많이 있습니다. 남해안 불교는 신라가 통일

하기 이전에 낙동강을 중심으로 여섯개의 가락국이 형성이 되어있었는데,그 중 6 가야국 중 하나인

낙동강 가장 남단의 가락국 김수로왕이 어느날 꿈 속에 하늘에서 청룡,황룡이 오색구름을 타고 남해안 바다가에

내리는 것을 보고 다음날 그 포구로 찾아갔더니 한척의 배가 들어와 기이한 외모의 스님 한분(장유화상)과

가야국 공주인 허황옥이 내렸습니다. 파사탑이라는 탑과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불교를 전하러 오는 중이었습니다.

그후 그 공주를 왕비로 맞이해 아들 9형제를 낳고 살았습니다. 맏아들은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고,둘째아들은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요.그래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예로부터 혼인을 못했습니다. 허황옥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이 수행하던 절이 지금도 남아있는 '장유사'입니다.'장유사'가 있는 면이라고 지금 장유시로 김해시

신도시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곱 아들이 외삼촌(장유화상)을 의지해서 출가해 지리산에 들어가

도를 깨달았습니다.그 도를 깨달은 곳이 (7왕자가 성불한 곳이라 해서 )지금 지리산 '칠불암' 입니다.

이 아들들이 가락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나라가 부흥하라고 흥국사,흥부암,보모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모은암,부은암,어머니가 바다에서 안전했던 은혜에 감사하며 해은암,가락국을 수호하는 산을 신어산 이라해서

동쪽에는 동림사,서쪽에는 서림사를 지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냐..A.D. 48년~54년 사이로 공식적으로 불교가 도입된 때 보다 300년이 빠른 겁니다.

동해안쪽으로는 남단과 북단불교가 있습니다.  북단불교는 금강산 불교인데, 금강산 유점사에 가면 능인보전

에 3천불조 53불을 모셔놨는데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서 중국에 닿아 배에 싣고온 동종을 끌어내리려해도

꼼짝을 안해 그대로 두었는데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어 부처님을 금강산에 모시고 지은 절이

'유점사'입니다. 그것도 훨씬 먼저 일어난 일입니다. 동해 남단불교는 기림사 불교예요.기림사 인접한 도로에서

기림사로 꺾어지는 길에 '인정성지'라고 쓰인 돌비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안락국 태자가 임정사에 계시는

강유성인을 찾아가서 고행난행을 해가면서 처자권속을 버려두고 도를 구하러 오는 구도기가 '안락국 태자경'

입니다.구도기 속 태자가 도를 구하러 온 곳이 바로 우리나라 동해 남단불교 기림사 입니다. 이렇게 많이 전래 

되었지만 나라와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해준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A.D. 372)에 순도스님께서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로 들어와 '이불란사'를 지은 때 라는 겁니다.그리고 아도화상은 신라에,인도승

마라난타는 백제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래한 겁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

였지만 신라는 가장 불교가 흥성했고 불교의 오계로 화랑 세속오계를 만들어 화랑도로 삼국을 통일을 했고,다시

고려 때 까지는 불교가 국교로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로 평가되는 '고려불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다시 이씨 조선이 건국되고,개국 공신의 90%가 유생들 이예요. 왜그러냐하면 고려조에서는 설자리를 잃고 할말을

못하고 탄압 당하고 가장 억울하게 살던 사람들이 유생들이었어요. 그 유생들의 억울한 심리를 야합해서 이씨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이씨 조선의 개국 이념이 뭐냐..억불숭유 정책 입니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배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기거하고 생활하면서 법당으로 사용하는 법당을 '인법당' 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산내

작은 암자들은 '인법당'이 많았어요. 그런데 인인개개인의 인법당을 다 가지고 있은 이유는 개인의 기도방 인 겁니다.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셔놓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이씨조선에 들어서 탄압을 하면서 기도를 못하게 되니 집에 있던

불상은 절에 업어다 놓게 된겁니다. 기도를 생활화하던 사람들이 강제로 기도를 못하니까 집에서라도 기도 방향을 설정해

놓고 하게 되었습니다. 경상도는 기도방향에 쌀이 담긴 바가지를 종이로 묶어 시렁에 올려두고 '삼신'이라고 했습니다.

삼신은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법신비로자나불,원만보신노사나불,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을 말하는 것 아니냐?'삼신할매'다.

그래서 고려조 까지는 아기를 낳으면 제일 먼저 찾아가 탄생을 고하고 공양을 올리던 부처님이거든?

경상도에서는 애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차리는 상이 '삼신상'이야. 삼신상에는 밥과 미역국만 놓고 고기는 절대

안놓거든? 그건 부처님 상 이니까... 경주 영천지방에는 '세존단지'라고 있어요. 단지에다가 곡식을 넣고 덮어서

'세존단지'라고 하는데,세존이면 부처님 10호 가운데 하나 아니냐? 그렇게 탄압을 하니까 '시주'다 이렇게 하는거야.

'시주'는 '세존'의 발음만 다른거 아니냐..이건 '터줏단지'다. 이래서 세존단지가 터줏단지로 바뀌고 삼신이 삼신할매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불교가 너무 많이 퍼져있으니까 불상을 파괴시키기 위해 '가정집에 부처님 모시면 해롭다'

는 말을 날조해 퍼트렸지만 단지에,바가지에 모시고 있으니 '불상 눈이나 코를 삶아 먹으면 자식 낳는다'는 소문을

퍼트린 겁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 보화리 불상도 두눈이 움푹 파이고 여기저기 파불이 된 상태인 겁니다.

그럼에도 유생들의 불교 탄압에 시달리다가 절을 버리거나 불사르고 나가게 된 경우 '전국적으로 빈대 때문에

망했다'라고 얘기 합니다. 참말로 빈대가 많아서 스님들이 못살고 망해서 폐사가 된 것이 아니고 이조 오백년 유생들이

스님을 괴롭히니까 유생들을 비유해서 빈대라고 그런 겁니다.

 

 

 

 

정읍 보화리 석조이불입상 - 보물 제914호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보화리

남쪽을 향해 나란히 서 있는 돌로 만든 이 두 불상은 백제시대 작품으로,서로 비슷한 모습이지만

크기나 특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백제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얼굴도 저런 지경인데 발 인들 남아났을까...

작은 불상은 오른쪽 팔 조차 없어진 상태이다.

 

 

 

 

큰 불상의 뒷면을 보건대 분명 광배가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석불이 바라다 보이는 주차장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내장사로 가기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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