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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위성리 마애여래삼존상 본문

남산 그리고 마애불

[경북 군위] 위성리 마애여래삼존상

lotusgm 2015. 2. 20. 21:03

 

 

 


 

2015년 2월 14일 묘허큰스님과 함께 마애불순례.

경상북도는 불국토라 할 만큼 전통있는 사찰도 많고 곳곳에 흩어져있는 마애불도 많은 것 같다.

농사를 짓고있는 계절에는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에 마애불이 있다고 묘허큰스님께서 몇번 말씀하신 적 있는

'군위 위성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드디어 참배하게 되었다.

이렇다할 이정표도 준비도 없는 곳에서 버스가 멈추고 내려서서 바라본 곳에 먼저 온 일행들이 모여있었다.

차들이 달리는 도로 아랫쪽 벼농사를 짓는 논을 건너 마애불이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성급한 마음으로 올려다 본 곳에 흐릿한 형체가 보였다.

설명을 듣고나서야 삼존불임을 알 수 있었다.

마애불은 제일 처음1992년에 처음 발견되었고,1999년 재발견 되었다는데, 주변에는 어떤 표식조차 없고

마애불이 양각되어 있는 바위는 모래와 자갈이 섞인 역암이라 자연스레 덮개 역활을 해주는 바위를

쓰고있음에도 마모가 심하고,관심과 관리가 없는 한 머잖아 그나마도 없어질 위기가 올 것 같았다.

 

 

 

 

 


 

바위 틈을 비집고 자라고 있는 한그루의 나무가 신비롭게 보이기는 하지만, 마애불의 생존에는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다행히 잎이  없는 계절이라면 모르겠지만 잎이 무성해지는 여름에는 시야가

확보되지않을 지도 모르겠다.

삼존불 주변으로는 다양한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어 원래의 모습이 어땠을 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바위 전체의 색 처럼 보이는 녹색빛 역시 채색의 흔적이라면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보존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야..

 

 

 

 

그리고 마애불 주변 새의 분비물로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위 틈에 혹시나 새가 둥지를 튼 것은 아닐까.

 

 

 

 


 

 

 


 

 


 

 


 


 

 

 


 

 


 


 

 


 

 


 

 

도진스님께서 바위 뒤에 버려져 있던 경고문을 찾아내셨다.

 

 

 

 

경고문

이 마애삼존불은 1,300년 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바위는 자갈이 섞여있는 역암으로 되어 있어

마모와 훼손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군에서는 이 삼존불을 문화재로 지정 절차 중에 있으므로 탁본 및 촬영하거나

그 보존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행위는 우리 군에 사전 협의 후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는 문화재보호법에 의거 의법 조치 하게됨을 알려드립니다. - 군위군수 -

 

 

 

 

지금 현재 마모가 심해 보이지만 사실 기록에 보면 이 곳 삼존 마애불은 예전에는 참 화려하고

채색을 했었다고 그래요. 지금은 비바람에 씻기워지고 그 흔적만 남아있는 겁니다.

저 왼쪽비에 쓰여진 화산은사華山隱士..이 뒷산은 전부 청하산 입니다. 청화산이란 이름은 아도화상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왜 화산華山이라 그러느냐 하면, 아도화상이 위나라 서울 낙양 근교에 있는 백마사에서 스님이 된 후

고구려로 돌아오자 어머님이 신라에 불법을 전할 것을 명합니다. 그래서 1차 전법지가 설중 도화가 만개한 곳, 그 곳이

지금 선산 도리사 예요. 그래서 복숭아 도桃, 오얏 리李 를 쓰는 곳은 설중 도화가 핀 곳이기 때문에 도리사 라고

하게 된 겁니다. 2차 전법지는 산 정상 근교 옹달샘에서 백련이 피어서 푸른빛을 방광하는 곳을 발견하면 바로 그 곳

이라고 했는 데 도리사 뒷산,지금 청화산 백련사 입니다. 청화산은 흰 연꽃에서 푸른빛이 방광했다고 해서 푸를 청靑에

빛날 화 華 청화산이고,절 이름은 우물에서 흰 연꽃이 피었다고 해서 백련사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물이 장군수라는 이름으로 그치지않고 흐르고 있고,그 절이 이제 1,600년을 전해져 내려 오다가 지금으로 부터

100여년 전에 마지막 사신 스님으로 용호강백이 백련사에서 출가한 후, 대강사로서 사불산 대승사와 예천 용문사에서

40년 동안 화엄경을 강의 하시다가 그 곳에서 입적하시지 않고 나오게 된 것은,선산 도리사 법당이 허물어졌는 데

법력이 있는 큰스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그 법당을 원만하게 조성할 수 없으니까 도리사 스님들이 용문사에 가서 용호강백을

모시고 와 불사한 법당이 오늘날 선산 도리사 큰법당 극락전 입니다. 그 후 용호강백은 마지막으로 당신의 본사인 백련사로

물러앉으셨는 데,그 용호강백이 입적한 지가 1887년이니까 올해가 128년 째야..그러면 128년 전까지는 절(백련사)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보통 구한말 고종황제 시절에 소실이 되었다고 만 전해져 내려오는 데,이 곳 피안현이 군이 되기

전이니까 1887년에 용호강백이 입적을 하시면서 "내가 죽은 지  17년 후에 다시 이 절에 올 터이니 그 때 보자"는 말을

제자 도암스님한테 남겼습니다. 그 후 1888년에 승암스님이 태어나 17살에 백련사로 출가해서 도암스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도암스님께서는 당신 은사스님을 당신 상좌로 맞은 것인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용호강백도 뛰어난 강사이고

강백 이지만 승암스님 역시 일대 강백인데, 그 승암스님께서 내한테 물려준 것이 내가 모시고 있는 사리이고,백련사를

복원 중창하기를 부탁받은 겁니다. 백련사가 중창될 그 일대는 불국천지 입니다.

화엄경에 복성동방사라림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님의 지시를 받아 남방으로 일백십성을 순례한 동자 이기때문에

관세음보살 왼쪽에 서있는 동자가 이름은 선재동자 인데 남쪽으로 순례한 동자라고 해서 남순동자 라고 그럽니다.

그 복성동방 림이라는 이름을 따서 복성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도스님이 처음 와서 율장을 강의하던

율리 라는 동네가 있고,그리고 위로는 보현동,그 위에는 청화산,그리고 청화산에는 아도스님이 처음 지은 백련사 지

가 있습니다. 그런데 또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아도스님이 백련사를 짓기 전에 아마 그런 내력을 보면 도리사 보다

먼저 지어졌는 지도 몰라요.. 위나라 낙양 백마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와

처음으로 사리를 모셨던 사리동이 여기 있다고..그래서 짐작해 보면 일단 도리사로 가시기 전에 아마 머물렀던 곳이

아니겠느냐..그렇지않으면 도리사에서 백련사를 짓기 위해 이리로 넘어와 계셨는 지 지금도 사리사가 있던 사리동이

남아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아도화상에 대한 역사에 얽킨 곳이 전부 백련사 쪽에 다 있습니다.

-  묘허큰스님 법문 중에서  -

 

 

 

 

바위 틈의 나무가 잎이 무성한 계절이었다면 그림자에 가려져 마애불을 발견하기는 쉽잖았을 것 같다.

 

 

 

 

마애불 왼쪽 편에는 동치同治(청나라 목종의 연호,재위 1862~1874) 6년이라 새겨진 마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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