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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나한기도 영험도량 양주 오봉산 석굴암 본문

아름다운 산사

대한불교조계종 나한기도 영험도량 양주 오봉산 석굴암

lotusgm 2025. 1. 25. 09:25

 

 

 

 

 

오봉을 바라보며 내려오다가 너른 공터에 도착한다. 몇 해전 북한산둘레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길에 석굴암 이정표를 봤지만 지쳐서 참배하지 못했던 기억이 나서 오늘은 기꺼이 참배를 하기로 했다.

우이령탐방지원센터에서 출발해 2.5km, 교현탐방지원센터까지는 2.0km 남은 지점이다.

 

 

 

작은 개울에는 백로 한 마리가 차가운 얼음 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이 추운 겨울에 뭐 먹을 게 있기나 한지...

 

 

 

예전에는 출입이 통제되던 군사지역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오르기 시작한 '석굴암 가는 길'은 경사가 얼마나 가파른지...역시 수행이다.

 

 

 

 

 

특이하게도 일주문이 아니라 불이문 편액이 달려있다.

 

 

 

 

 

 

 

不二門을 지나고도 한참을 올라 '오봉산석굴암토지불사공덕비'를 지나고

 

 

 

 

석굴암 창건에 대해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께서 창건했으며, 고려 공민왕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께서 3년간 수행정진 하셨다고 한다..

중창주 초안스님의 은사이신 동암선사께서는 조국광복을 위해 끊임없이 상해 김구선생의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 운동을 하시면서 틈틈이 석굴암에 오셔서 수행정진 하셨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1950년 6·25사변으로 인하여 석굴암의 전각이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창건주 초안스님의 세수 28세 1954년 6월 5일 석굴암에 오셨을 때에는 대지 한평도 없었고, 법당은 완전 전소되고,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석굴안에는 전화로 인해 아미타불, 지장보살, 나한님과 수구다라니 목판만 남아 나뒹굴고 파손되어 있었다.

초안스님께서 모두 소중히 수습하는 동시에, 모친 조 삼매심 보살님, 화주 윤 일광심보살님과 함께 폐허가 된 경내지에 임시로 움막을 짓고 주변에 널려 있던 수많은 전사자들의 시신을 화장 또는 안장해 주셨다.그리고 석굴암의 중창복원 불사를 일심으로 발원하는 천일기도에 들어가셨다.이로써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초안스님과 두 분 보살님의 뼈를 깎는 헌신과 간절한 기도 원력 덕분으로 차근차근 불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석굴암 홈페이지 '석굴암 창건과 연혁' --

 

 

 

햐...풍광의 기세가 대단한 곳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바위산에 아담한 석굴암 대웅전이 기죽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지붕 용마루 끝에 모인 

기개 역시 만만찮은 까닭이 아닐까 싶다.

 

 

 

 

 

 

 

 

 

 

 

범종각과 삼성각.

 

 

 

 

 

석굴암 삼성각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적멸보궁' 창밖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있는 듯 하다.

 

 

 

다선루(차방) 축대 아래에 '석굴암 마애불'로가는 길이 있다.

 

 

 

 

 

 

 

 

 

'석굴암 마애불'

 

 

 

 

 

 

 

 

지금으로부터 약 200여년 전인 1792년의 일이다. 당시에는 석굴암에 노스님과 동자승 단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

그 날은 마침 동짓날이었고, 밖에는 많은 눈이 와서 마을과의 왕래가 두절되었다. 동자승이 아침 일찍 일어나 팥죽을 끓이려 아궁이를 헤집어 보니 그만 불씨가 꺼져 있었다. 노스님께 꾸중들을 일에 겁이 난 동자승은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동자승이 공양간에 가보니 아궁이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로 같은 시간. 석굴암에서 10여 리 떨어진 아랫마을 차(車)씨네 집에서도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당시 50대 초반의 차씨 부인(파평 윤씨)이 인기척에 놀라 부엌밖으로 나가보니 발가벗은 아이가 눈 위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차씨 부인이 "어디에서 새벽같이 왔는냐?"하고 묻자 동자승은 "오봉 석굴에서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대답했다. 차씨 부인은 하도 기가 막혀 "아니, 스님도 너무 하시지. 이 엄동설한에 아이를 발가벗겨 불씨를 얻으러 보내는 법이 어디 있냐"고 안타까워하며, 때마침 펄펄 끓는 팥죽 한 그릇을 떠서 동자승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통아이 같으면 펄펄 끓는 팥죽을 수저로 불며 떠 먹었을 텐데, 이 동자승은 그릇째로 들이마시더라는 것이다.
얼른 부엌에 가서 불씨를 담은 차씨 부인은 소중히 동자승에게 건넸고, 불씨를 얻은 동자승은 홀연히 자취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눈이 어느 정도 녹아 노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가니 차씨부부가 일주일 전 동짓날 새벽에 일어났던 일의 전말을 설명하면서 노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노스님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동짓날 사시에 마지를 드리려고 예블을 드릴때 나한존상의 입가에는 팥죽이 묻어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났던것이 새롭게 떠 올났다.

그래서 동자승을 불러 확인해 보니, 동자승이 불씨를 꺼뜨리고 황망중에 나반존자께 기도를 드렸는데, 불씨가 저절로 되살아나 팥죽을 끓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다는 것이었다. 바로 동자승의 안타까운 사정을 굽어살핀 독성님이 이적(異蹟)을 보이셨던 것이다. -- 석굴암 설화' 독성님과 동지 팥죽' --

 

 

 

'나한전' 굴법당에 봉안되어 있는 '양주 석굴암 석조나한상'(경기도문화유산자료)

 

 

 

 

 

 

 

조성한 지 얼마되지 않은 듯 보이는 '윤장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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