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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김정희 선생의 묵향이 서려있는 '예산군 추사고택' 본문

서부내륙고속도로에 올라 일찌감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어디쯤 부터인지 스쳐지나가는 도로표지판에
예산 방향으로 '예산추사고택(신암)'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갈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신암 IC'로 빠졌고
일사천리로 추사고택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신암 IC에서 왕복 4km정도)

추사고택은 조선후기 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곳은 선생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1720~1758)이 조선 21대 임금 영조(1694~1776)의 따님 화순옹주(1720~1758)와 혼인한 뒤 용궁리 일대를 하사받으며 지어졌다. 건축 당시는 53칸 규모였지만 현재는 안채,사랑채,사당 등 일부만 남아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제일 왼쪽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역.

'김정희 선생 묘'는 김정희 선생과 첫째 부인 한산 이씨, 둘째 부인 예산 이씨 세 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 선생은 아버지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 사흘 전에 쓴 글씨가 서울 봉은사 경판전에 걸려있는 '板殿'이다.





가문 대대로 사용하던 우물로, 우물에는 김정희 선생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김정희 선생을 나았는데,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굳이 딴지를 걸자면 어머니가 임신한 줄 착각을 해서 달 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무리 과장이라해도 12개월이라면 몰라도 24개월만에 출산을 한다는 건.ㅋ~)


우물 바로 옆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면 추사고택의 제일 안쪽 '안채'이다.
봄에 흐드러지게 필 목련나무의 모습이 기대되는 모습이다.

원래 부터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둥 마다 김정희 선생과 관련된 주옥같은 싯구들이 적힌 주련이 걸려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옆문 양 옆에 걸린 주련에는 녹음상간양삼가(綠陰相間兩三家: 녹음 사이 섞여있는 초가 두세 집)
추수재심사오척(秋水纔深四五尺: 가을 물 깊어 봐야 너댓 자)


'안채'는 ㅁ자 모양으로 6칸 대청에 안방,건너방,부엌,광 등을 갖추고 있는데,6칸 대청은 흔치 않은 규모의 마루이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인데,
이는 왕실 주택구조로써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랑채'는 ㄱ자 남향집으로 온돌방이 남쪽이 한 칸,동쪽에 두 칸 있으며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손님을 접대하고 문학적인 유희를 즐기는 곳인 사랑채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구조이다.
고택에 있던 김정희 선생의 장서는 수만 권이었다고 하는데, 1910년 무렵에 화재로 불타버렸다.

'사랑채' 목련 화단에 있는 이 네모난 돌기둥은 김정희 선생이 직접 제작한 해시계이다. 건물 전체가 동서 방향으로 자리잡은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 선생의 아들 김상우가 새긴 것이라고 한다.


추사고택 '사랑채' 입구.




건물들 뒤로 난 길로 올라가면 아들 김상우가 지은 영실이 있다.

영실에 걸린 추사영실(秋史影室) 현판(복제품)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1856년 돌아가시고 1년 뒤 친구인 이재 권돈인 선생이 추사체를 구현하여 썼다. 영실을 준비하며, 추사 김정희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원본을 쓰고 현판으로 새겼다.
원판은 간송미술관 소장이며, 현판은 예산군 추사고택 소장이다.

영실에 걸린 김정희선생의 초상은 1857년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난 여름에 화원 출신의 제자인
희원 이한철선생이 그렸다.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영실 정면의 김정희 선생 초상은 누구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방향으로 걸려있다.)


추사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부인 화순옹주가 함께 묻힌 '월성위 김한신의 묘'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인물이 잘생기고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 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담장 너머 특이한 모습을 보고 건물의 앞쪽으로 내려갔다.


'화순옹주 홍문'은 영조의 둘째 딸이자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이다.
화순옹주는 13살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 김한신과 결혼했는데, 김한신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는
14일을 굶어 남편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옹주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불효라 하며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열녀문을 내렸다.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이다.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생존 연대가 똑 같이 1720~1758 이다.)



건물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건물이 있던 터인 듯 보였다.

천연기념물 106호 '용궁리 백송'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은 김정희 선생이 25세 때에 청나라 연경을 다녀 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으나 두 가지는 말라 죽었고 현재는 한 가지만이 남아있다. 백송은 어릴 때는 껍질이 담회색이었다가 40년이 지나야 큰 껍질 조각이 떨어지며 특유의 하양 빛깔이 나타난다. 백송은 우리나라에서는 번식이 어려워 몇 그루 밖에 없는 희귀한 나무로, 현재 남아있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이 가져온 것이다.

'급류정 김흥경 묘역'(추사 고조부)

'백송'의 아랫 부분에 원래 세 가지였다가 죽어서 잘라 낸 두 가지가 보이는데, 안내판의 설명을 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 처음부터 내 눈에는 완벽한 하트 모양을 한 '백송'의 머리 부분만 보였다.
진짜 하트다...이 백송이야말로 완벽한 '사랑나무'이다.

묘역 주변에는 연세있는 몇몇 분들이 뭘 하시는지...
다시 신암IC로 돌아와서 서부내륙고속도로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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