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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전북 익산]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본문
2017년 3월 23일 묘허큰스님과 함께 마애불순례.
아직 봄이라고 하기엔 밤낮의 기온 차가 커도 너무 큰 3월 마애불순례는 전라북도 익산으로 떠났다.
출발해서 3시간만에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바로 앞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엄청난 모습의 석불 입상에 모두들 걸음이 빨라졌다.
역시 검색해 보지 않고 온 것은 잘한 것 같다.
어설프게 보고왔다면 이만큼의 설레임은 없었을 터..
입상의 뒷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내판에서도 읽었지만 ..놀라운 일은 200m 떨어진 정면에 똑같은 석불 입상이 서있다는 사실이다.
양쪽 옆에 딸기 비닐하우스길을 지나 또다른 석불입상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 본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6호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신체표현이 절제된 거대한 석상의 형태를 하고있다.
대부분의 미륵부처님에서 처럼 과장되게 긴 몸체와 큰얼굴에서 균형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고도리 석불입상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 때문인지 처음으로 미륵부처님이 아름답게 보이기 까지 했다.
그런데 미륵부처님을 모셔두고 왜 석조여래입상이라고 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석조미륵입상...혹은 석조미륵불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언뜻 보면 몸체는 단순한 선각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손이 빠져나온 긴 소매자락에 비해
분명 가운데 몸통 부분이 조금 더 얕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안쪽 석상은 각진 얼굴 윤곽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 주변에 수염자국이 있어 분명 남성적인 느낌을 갖추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오히려 안쪽에 남성적 석상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인데
모르긴해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미륵불이 그러하듯 삼도는 없고
역설적이긴는 하지만 외계인처럼 머리통이 높이 솟은 위에 갓을 만들어 끼운 것 처럼 보인다.
귀는 얼굴 길이와 맞먹게 길게 늘어지고, 머리 부분은 마치 따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 처럼
깊은 이음새가 보이지만 틈이 균일해서 과연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나와 준비해 간 공양물과 마지를 올리고 예불을 올렸다.
묘허큰스님께서 바로 옆 딸기 농장에서 딸기를 사서 미륵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모두에게 한 상자씩 나눠 주셨다.
바깥쪽 석상은 얼굴의 선이 부드럽고 이목구비도 훨씬 오밀조밀하게 여성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목의 이음새도 없다.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을 하고있다.
백제는 수도가 공주와 부여 두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왕궁사찰로 지어진 곳이 '익산 미륵사지'입니다.
그 시대는 미륵신앙이 굉장히 강하던 때였는데,나라가 위태롭고 망할 지경에 이르니 출현하실 미륵부처님에 대해
신봉하고...성행했었습니다.그런데 미륵신앙은 어디서부터 생겼느냐..석가모니부처님이 미래 생을 위해 설해 놓은
경전 ..미륵상생경 과 미륵하생경이 있어요.미륵상생경에는 미륵부처님이 도솔천 내원궁에 미륵보살로 삼천년을
머물러요..도솔천 내원궁 수로 삼천년이면 인간세상 수로는 석가모니부처님 열반하신 후에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거야..석가모니부처님 열반하신지가 이제 2561년 되는데 56억 7천만년은 까마득한데 한번씩 자칭 미륵이라는
분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한번씩 말법시대가 오면 미륵불이라며 나타나지만 지금 미륵부처님은 아직 부처님이 아니고 도솔천
내원궁에서 미륵보살로 계시다가 근말이 되면 이 세상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지만 미륵부처님은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석가모니 부처님은 300여회가 넘는 회를
거쳐 8만4천 법을 설해 놓으셨지만 미륵부처님은 3번의 법문으로 세상 중생 모두 제도시키는,삼회도인이라 그럽니다.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세번의 설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해 마치는 그런 삼회도인이 아직 도솔천 내원궁에 미륵보살로
계셔요.그런 미륵사상이 백제도 망하려하고 백제 말년에 그런 신앙들이 성행하는 가운데 미륵부처님의 가호로 백제를 지키기 위해서
미륵 세계사를 짓고,미륵사지에도 가보면 굉장합니다..이 일대가 왕궁이 있던 궁터라 왕궁사찰이 있으니까 미륵부처님의 가호를 받기
위해...'나는 지금까지 살아도 똑 같은 미륵부처님을 마주보게 모신 곳은 처음입니다' 왜 이렇게 마주 모셨놓았는 지 기록이 없네요.
- 묘허큰스님 마애불 법문 중에서 -
큰스님께서 오시는 길에 휴게소에서 만오천원 주고 구입한 모자를 자랑하시는 중...
정말 일당백..다양한 스타일로 연출이 가능하다시며..UPF 40+ㅋ~
묘허큰스님께서 짧은 법문 하시는 중에 다른 참배객들이 한 차 내렸다.
묘허큰스님을 알아 본 사람들은 멀리서 부터 스님께 합장을 하고 안쪽 석불입상으로 참배하러 들어갔다.
귀찮아서 대충 각자 한가지씩만 들고나와도 진수성찬이 된다.
바람이 잦아들고 햇살이 좋아 두려움없이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도 이런저런 이야기거리에 털고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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