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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옥천서원-- 90 평생을 정신으로 쓸고 닦고 아끼던 분은 떠났지만 지금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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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옥천서원-- 90 평생을 정신으로 쓸고 닦고 아끼던 분은 떠났지만 지금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긴다.

lotusgm 2023. 4. 2. 12:05

 

 

 

 

 

두어번 옥천서원을 거쳐가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않았던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느 시골 마을이 하나 쯤 가지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만 의미와 의무가 있는 서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듯 싶다.

그런데 그날은 '옥천사원'의 정문인 '행의문' 옆 관리사 문을 동여맨 철사를 풀고 사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성주 '옥천서원'은 이사룡(李士龍, 1612~1640)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

조선 숙종 18년(1692) 그가 살았던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다.

'충렬사'는 정조 20년(1796)에 사액을 받고 '옥천충렬사'또는 '옥천서원'으로 불렸다.

 

※이사룡은 1640년(인조 18)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포사(砲士)로 징발되었는데, 금주(錦州)에서 명장(明將) 조대수(祖大壽)와 대전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공포(空砲)로 응전하였다. 이를 본 동료가 적극 말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면서 듣지 않았다.

끝내 청군에게 발각되어 잡혀가서 칼로 위협을 받았으나 청장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굴하지 않았다. 이 때 우리나라 장령(將領)들이 청장에게 용서를 빌어 살려주기로 허락을 받았는데도,이사룡은 웃으면서 스스로 죽음을 청하여 의롭게 죽었다.

청장들이 비록 이사룡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사룡의 높은 절의에 크게 감탄하였다. 뒷날 칠포만호·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성주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본관은 성산(星山). 할아버지는 수문장 이유문(李有文)이며, 아버지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한 공으로 무관에 오른 이정건(李廷建)이다. -- Daum백과 --

 

 

 

 

안마당으로 들어서기 전에 먼저 눈에 들어 온 사원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듯한 

배롱나무와 나무가 보하고 있는 작은 전각 뒤에는 (나중에 알았지만) 가묘가 있다.

서원과 가묘가 함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고 한다.

 

 

 

 

마당 가운데 자리잡은 '옥천서원'의 중심 강당(강학 공간)인 '충의재'이다.

팔작지붕의 다섯칸짜리 건물 앞에만 서도 '옥천서원'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어진 건축물이다.

마루 양쪽에는 완성도 있는 온돌방이 있고 각각은 하나의  툇마루로 이어져 있다.

 

 

 

 

 

 

 

 

 

 

 

 

 

 

 

 

 

 

 

'충의재'에는 사방으로 다양한 편액이 걸려있는데 내용을 짐작할 수도 없는 내게는 마치 미술작품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모양새 만으로도 근사해 보였다. 영원히 그 내용은 알길이 없어져 버렸으니 아쉬울 뿐이다.

 

 

 

 

 

 

 

 

 

 

 

 

 

 

 

 

 

 

 

 

 

 

'충의재' 앞 마당에 마주보고 있는 서재와 동재 중 서재인 '양현재'

 

 

 

 

 

 

 

동재인 '현덕재'

 

 

 

 

 

 

 

 

 

 

'충의재'에서 바라본 '옥천서원'의 정문 겪인 '양의문'의 모습.

특이하게도 솟을대문 양 옆에는 툇마루가 딸린 행랑채가 있다.

 

 

 

 

 

 

 

 

 

 

 

 

 

 

 

 

'충의재' 앞에서 바라 보면 마을의 모습과 건너편 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의재' 뒤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상절문'의 모습도 굉장히 정중하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문고리가 녹이 쓸었는지 내 힘으로는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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