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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②동학혁명 유적지 손화중피체지 ③인촌 김성수 생가 ③천연기념물 고창 수동리 팽나무 ④만정 김소희 생가 본문
②동학혁명 유적지 손화중피체지 ③인촌 김성수 생가 ③천연기념물 고창 수동리 팽나무 ④만정 김소희 생가
lotusgm 2024. 7. 6. 10:36
미당시문학관을 관람하고 나와 다시 10여분 버스로 이동해서 내려 선 곳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손화중피체지 이다.(피체지란 피신해 있다가 체포된 장소란 뜻이다)
동학혁명의 가운데 지역이라, 동학혁명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은 곳에 와서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외운 시절의 지식에 멈춘 상태라 적잖이 생소한 사실들이 많다.
이렇게 하나같이 관심을 보이는 모습 때문에 어디를 가든 안내판 앞에 서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을 맞는 해라고 한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동학혁명 주요 인물 중 김개남은 강경파, 전봉준이 중도파라면 손화중은 온건파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기질은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자란 성장 과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른 결혼으로 가정을 꾸렸고 20세를 전후하여 세상을 두루 돌며 의식을 넓히고 부패한 조정과 타락한 집권 세력을 향한 불만이 자라고 있었다.
공부하러 간 지리산 청학동에서 동학에 입도한 후 1890년대 초반부터 고향 정읍이 아닌 무장(茂長) 지역에서 동학 접주로 활동하게 된다. 초기엔 최시형 영향력 아래 직간접으로 연결된 호남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온건한 전술을 펼치려 한 그의 행적은,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동학을 받아들였다는 데에서 다분히 영향을 받았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배꼽에서 비결을 꺼낸 일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다. 이로 인해 그의 주변으로 많은 민중에 결집하기 시작했다.
혁명 실패 이후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에 은신하던 손화중이 제각(祭閣: 묘를 관리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을 지키던 이봉우에게 자신을 돌봐줬던 은혜를 갚겠다며 '나를 밀고해 포상을 받으라'고 한 일화는, 그의 품성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 Daum 오마이뉴스 2024.01.07 기사 일부 발췌 -
어느 가문의 재실을 지키는 재지기가 살고있는 재각인 이 곳에 '동학농민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손화중' 접주가 피신해 있다가 체포된 동학혁명 역사에 의미있는 장소에 앉아있다.
재각은 침(심)명제 忱溟齊 현판이 달려있다.
처마 안 마루에서 비를 피하느라 한참을 기다려도 비는 사그라 들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어느 순간 마당으로 떨어져 내리는 홈통의 물줄기 소리가 세찬 빗소리를 잠재운다.
비바람때문에 우산을 부여잡고 다시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
손화중피체지에서 출발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버스가 멈춘 곳은 '인촌선생 생가' 앞이다.
이 건물은 대한민국 제 2대 대통령이며 정치,언론,교육,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근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촌김성수 선생과 그의 아우로 근대 공업화의 선구자요 민족자본 육성의 수범자인 수당 김연수 선생 형제가 탄생한 생가이다.
인촌 선생은 1891년 10월11일, 수당 선생은 1896년 10월1일에 작은 댁 안채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봄, 그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떼의 횡포와 도께비불의 출몰 때문에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양가 다 같이 이사하게 됨에 따라 두 분도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사 후 이 건물은 마을 주민에게 위탁 보존하여 오다가 1977년 수당 선생이 자비를 들여 옛모습 그대로 보수함과 동시에 없어진 건물은 복원하고 5m의 진입로를 개설, 동년 8월에 완공하였다.(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나는 인촌 김성수 선생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긴 직사각형의 대지 위에 낮은 담을 경계로 여러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게 집이 배치되어 있어
여러 채의 집을 한참이나 지나 깊숙한 안채까지 들어가야 했다.
제일 왼쪽이 仁村 선생 동상, 제일 오른쪽은 인촌 선생의 양부 원파 김기중 옹 동상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큰집 안채 마루에 앉아...
인촌선생 생가를 나와서 다시 버스에 올라 10여분 후 내려 선 곳은 천연기념물 제494호
고창 수동리 팽나무가 있는 곳이란다.
워낙 노거수들이 곳곳에 많아서 일까? 멀리서 볼 때는 팽나무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다가갈수록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팽나무의 위용에 제압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높이 12m, 둘레는 22.7m 팽나무는 생기기도 참 잘 생긴 나무다.
딱총에 팽나무 열매를 끼워서 쏘면 팽~하는 소리가 난다고 팽나무라 했다니...정말일까?
그 열매는 닷맛이 나서 먹을 수 있고, 나무로 도마를 만들기도 하고, 고목이 된 팽나무에는 팽이버섯이 자란다는
안내판의 설명이 하나같이 흥미롭다. 예전에는 팽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팽나무에 밧줄을 감아 정박하기도 했다니
일당백 이 팽나무는 마을의 안녕와 풍년을 기원하던 당산나무로, 마을지기 신으로의 자격을 충족하고도 남았을 것 같다.
이리봐도 저리봐도 멋진 나무다...천수 하시길...
잠시 이동하고 또 내려선 김소희 생가의 내내 궁금했던 이정표 속 '김소희'가 내 알량한 지식에 들어있는 바로 그 '명창 김소희'가 맞았다. 반갑게도 골목 밖 전봇대에 붙어있는 서해랑길 43코스 화살표가 길을 안내한다.
바쁘다 바뻐~ 비가 오지 않았다면, 버스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곳을 가 볼 수 있을까.
국악계의 사표이며 국창으로 불리운 '만정 김소희'는 1917년 이 곳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광주로 가서 명창 송만갑의 제자가 되었고, 100년에 한번 나기 힘든 천부적인 목소리에 노력을 더하여 3~4년의 짧은 기간에 명창의 반열에 올라 인간문화재(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받았다. 1995년 4월(향년79세)에 타계하였으며 묘소는 유언에 따라 고향에 모셔졌다.
이 집은 마을 주민이 개축, 관리하여 오던 것을 2002년 5월에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김소희 생가 앞 집 담벼락에 서해랑길 화살표가 붙어있으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조금 더 걸어 볼까요?
어뗘요? 그 와중에 버스로 돌아 간 사람과 걸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쓴 무리가 조용한 마을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어디 청포도 익어가는 내음 안나요?
사포리경로당
마을 골목을 벗어나 조금 올라간 사포버스정류장 앞에서
서해랑길 고창43코스 종점이자 부안44코스 시점 안내판을 만났다.
우리가 잘 가고있다는 생각에 왜 그리 반가운지...
'무명 의병 충의 위령탑'
정유재란 때 왜군은 조총 화총으로, 아군은 죽창 화살 칼로 대항하다 전멸하였다. 파도와 같이 출렁이던 왜군들과 부패된 시체들이 뒤엉킨 채 어디로 갔을까? 현지 주민 손동규씨에게 확인한 바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았을 때 머리 끝이 창공으로 솟고 눈물이 감돌고 한이 맺혀 竹松 최일수는 이 곳에 영혼탑을 세우다.
서해랑길 부안44코스 진행 방향의 후포마을로 들어간다.
추적추적 빗 속에도 자연 색은 모른 채 지나 갈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점방'이라는 간판에 발걸음이 멈췄는데, 모두들 다 같은 마음인가 보다.
'지역 경제를 도울 겸'이라는 거창한 핑계를 대며 우~ 점빵 안으로 밀려 들어 갔다.
건빵 봉지도 뜯고, 막걸리 잔도 챙기고, 동네 사람처럼 알아서들 자리를 잡고... 막걸리들 참 좋아하셔...
뭔 일이래? 사장님 놀라서 김치 내 놓으시고...
사장님까지 불러내서 남기는 인증샷 ...표정들이 저리도 행복해 보이면 다 된거지.
바로 옆 '후포 버스정류장' 앞에 서있는, 내일 걸을 서해랑길 부안44코스 이정표를 확인하고
다시 '사포 정류장'까지 걸어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 버스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17시25분)
저녁은 토종닭 백숙...까지는 좋았는데 운동을 많이한 근육질 토종닭 고기가 너무 질겨서 국물로 원기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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