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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폭우 속 서해랑길 고창43코스(선운사버스정류장~사포버스정류장)를 버스로 누비다 ① 미당시문학관 과 미당생가 관람 본문

♡ 내가 사는 세상/한 발 한발 서해랑길

폭우 속 서해랑길 고창43코스(선운사버스정류장~사포버스정류장)를 버스로 누비다 ① 미당시문학관 과 미당생가 관람

lotusgm 2024. 7. 6. 10:27

 

 

 

 

서해랑길 42코스를 걷고 오후 일정을 시작하려니 호우주의보가 맞아 떨어진 폭우로 한치 앞도 안보이는

상황이라 의논 끝에 서해랑길 43코스 안에 있고, 차로 이동해서 갈 만 곳들을 둘러 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갈 목적지는 미당시문학관.

 

 

 

 

 

막상 버스에서 내려서자 우산이 뒤집힐 정도로 비바람이 요란스러운데 정작 미당시문학관 마당은 너무나 평온해 보인다.

건축가 김원의 설계로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를 개보수하여 2011년11월3일 문을 연 미당시문학관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정신과 문학적 자산을 기리고 보존하기 위해 시인의 고향에 마련한 기념 공간이다.

 

 

 

미당시문학관은 2024년부터 고창군과 동국대학교가 민간 위탁운영 협약을 맺어 동국대학교 마당연구소가 운영하고 있다.

 

 

 

서정주 시인의 친필로 쓴 시.

 

 

 

 

 

영상실에서 5분 정도 시인에 대한 영상 자료를 보고.

 

 

 

문우들과 후학들이 말하는 미당.

 

 

 

금관문화훈장. 2001.01.12

 

 

 

창 밖에는 비바람 불고요~

 

 

 

1층의 혼례사진, 가족사진 전시.

 

 

 

'2000년 10월10일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뜨자 그도 곡기를 끊고 두 달 반 만에 하늘로 돌아갔다.'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해설이 있는 미당시 전시회.

 

 

 

1층~6층으로 오르는 전시실의 계단과 복도에도 시인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미당이 30년간 거주했던 서울 관안구 남현동 자택 봉산산방 서재를 재현하였다.

 

 

 

전시동을 오르는 계단 옆 사진들은 미당이 암송한 세계의 산에 대한 등정경험을 문학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3층에는 미당이 수십 년간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그들과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성철 큰스님과 함께 해인사에서.

 

 

 

 

 

 

 

4층에는 시집, 자서전, 수필, 전집, 등 저서가 전시되어 있는 중에 

서정주의 친일 수필과 시도 함께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서정주의 친일 변명)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나는 이 때 그저 다만 구식의 표현을 빌자면...

'이 것은 하늘이 이 겨레에게 주는 팔자다'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익히며 살아가려 했던 것이니

여기 적당한 말이려면 

'종천친일파(從天親日派) 같은 것이 괜찮을 듯 하다.

 

 

 

그의 일제시대 일부 행적,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대 집권당 협조 등으로 "아부와 굴종" 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했지만

이 또한 그의 문학을 중심에 놓고 난 후에야 이뤄지는 문학 외적인 비판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한다.

 

 

 

 

 

시상을 떠올릴 때 가슴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심장의 표피가 말라 들어가는 병을 얻었다"고 자가진단했던 그...

그 가슴앓이로 폐렴을 얻었을까. 그제부터 착용한 산소호흡기를 걷어내지 못한 채 그는 세상을 떴다.

그가 그토록 신들린 듯 눈부시게 노래했던 모국어와 시의 신화는 풍성하고도 영원한 선물로 우리에게 남겨져 있다.

 

 

 

먼저 올라 갔다가 내려온 누군가가 전망대에 대해 이야기 하길래...

우산도 입구에 두고 들어왔지만 잠시 비 좀 맞은들 어떨라고...이미 신발은 거의 장화처럼 젖었다.

6층 '바람의 전망대'

 

 

 

콘크리트 외벽에 목재를 붙인, 설치물 같아 보이는 난간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드문드문 풍경도 보인다.

 

 

 

'바람의 전망대'라는 이름답게 세찬 비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같이 올라 간 몇몇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인증샷도 남기더라.

 

 

 

 

 

 

 

 

 

 

 

'바람의 전망대'까지 정복하고 내려가면서 다시 내려다보니 새삼스럽게

낯선 전시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미당이 외운 세계의 산이름 목록 육필 원고.

미당은 만년에 기억력의 감퇴를 막기 위해 지구의 오대양 육대주의 높이 솟아 있는 1,628개의 산 이름들을 암송했다. 

매일 아침 자택 뜰에 나와서 30~40분에 걸쳐 그 희안한 이름들을 불러 모아 공중으로 보냈다.

 

 

 

 

 

미당시문학관 입구 바로 옆의 마을 길로 무조건 따라 나선다.

비바람은 우산을 쓰나마나 들이치니 이제는 어느 정도 초월한 상태이다.

 

 

 

'미당 생가'

 

 

 

未堂 徐廷柱(1915~2000): 1915년 6월30일 전북 고창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중앙 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 된 후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모두 15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1954년 예술원 창립회원이 되었고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2000년 12월24일 향년 86세로 별세, 고향 선운리에 안장되었으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다섯살때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살 때 부터다.

부모가 웬 일인지 나만 혼자 떼놓고 온 종일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듬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쉬운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 듯 이끌고 갔다....

 

 

 

마당 귀퉁이 뜰보리수 아래 조각상과 함께 시인의 시가 적힌 낡은 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쏟아지는 비에 떨어진 뜰보리수 붉은 열매가 덮힌 조각상이 섬뜩해 보였다.

 

 

 

 

 

 

 

 

 

'국화 옆에서'

 

 

 

단촐한 두 채의 초가가 마주보고 있는 마당에는 우물과 그 위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 키 큰 가죽나무 한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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