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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누구에게는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던, 나는 존재 조차 몰랐던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본문
다음 날은 비도 오고 바람도 많이 분다고 하니 더 늦기 전에 마음에만 두고 있던 이 가을 '창경궁 춘당지'를 보러 나선 길.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우연히 깨달은 검색의 오류...이미 늦었고 허탈함은 말을 잃게 만들었다. 경복궁으로 검색을 했나 보다. 모든 궁은 월요일에 문을 닫고 오직 경복궁만 관람할 수 있으니 우리가 가야할 창경궁은 일단 포기해야 했다.
그러면 뭐 경복궁 가면 돼지.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가는 길에는 이런 조형물이 있었고 (적어도 내 눈에는 국적 불명으로 보이는) 한복 이라는 걸 입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을 미디어아트로 만나 볼 수있는 공간으로, 조선 왕실 유물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조선 왕실 문화의 전통과 현재를 이어주는 '이음길' 시도가 인상적인 길이 있다.
의도한 '이음길' 마지막 어두운 구간을 벗어나면 눈 앞에 펼쳐지는 나로서는 처음보는 광경이다.
옛 담장 너머 빌딩이 눈에 거슬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박물관을 나서면서 였다.
입구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계단 앞을 가득 메운 아이들에 놀라고 옆지기의 탄성에 또 놀랐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는 건데, 사실 박물관 관람에 긴 시간이 걸린 건 오히려 '고궁박물관'에 무지했던 나였다.
고궁박물관 답게 입구의 모습도 특이하다.
놀랍게도 무료관람이다.
1층은 대한제국실
지하 1층은 궁중서화와 열린 수장고, 왕실의례, 과학문화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다.
2층은 전시를 준비 중이라 관람을 할 수 없다.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대한제국의 국새와 국새를 담은 함.
국새에는 '황제어새 皇帝御璽'가 새겨져 있다. 고종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주변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당시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작성한 고종의 친서와 밀소에는 황제어새가 찍혀있다.
시대적 급박함과 고종의 자주 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보여준다.
고종>>짐이 덕이 없다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天地에 告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光武' 원년으로 삼으며...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대례의궤, 조칙 1897년 9월18일)
순종>>지난 날의 병합(한일병합늑약) 인준은 강린强隣(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니 나의 한 바가 아니라...나는 宗社의 죄인이 되고 2천만 生民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이 조칙을 따라 안팎에 선포하여 최애최경最愛最敬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알게 하면 이전의 병합인준과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융회황제 순종의 유조遺詔,대한신보 1926년 7월8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의례와 제도가 조정되었다. 기존 조선의 국왕과 궁중에서 사용하던 의례 용품도 붉은 색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바꿨다. 대한제국 시기 궁중 잔치를 기록한 그림에서 황색 의자와 각종 의례용품을 올려놓는 탁자, 황색 부채 등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이 지계 4대조(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황제로 추존하면서 제작한 옥보로, 황제국의 격에 맞춰 용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제작하였다.(대한제국, 1899년-보물-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대한제국 시기를 전후하여 궁궐에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서양식 가구와 장식용품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가구와 생활용품 대부분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자두꽃)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법궁法宮이자 도시 근대화 사업의 중심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궁역을 확장하고 전각을 신축하였으며 궐내에 서양식 건축물을 지어 근대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삼기도 하였다.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김에 따라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궐이 되었고, 이름도 고종의 궁호宮號에 따라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다.
덕수궁 이전의 경운궁 전각의 현판들.
궁궐 내 도입된 근대시설 중 궁궐 생활 전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기시설은 1887년(고종24) 경복궁 건천궁에
최초로 전등이 켜졌다.
궁궐에 본격적인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내부에는 높은 천장에 화려한 조명과 서양식 커튼, 카펫으로 장식되고 침대, 의자, 탁자 등의 서양식 가구들이 비치되었다.서양식 가구의 도입으로 황실 가족들의 생활은 점차 입식 생활로 변모하였다.
가구들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들여 온 값비싼 것들로 채워졌다.
세면용품.
근대식 연회와 왕실 식기.
개항 이후 세계 각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서양의 외교관 등과 교류하기 위한 서양식 궁정연회가 도입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근대기 수입 도자기들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 일본 자기회사의 제품으로 금색 오얏꽃 무늬로 장식한 것들이 많아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8년에 찍은 황실가족 사진.
지하 1층 전시실로 이동하는 계단에 걸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과학문화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짜투리 휴게 공간도 잘 어울린다.
문방도 4폭 병풍.
문방文房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사색하는 공간인 서재를 말하며, 문방에 갖추어 놓는 종이, 뭇, 먹, 벼루 등 필기구를 '문방구'라 한다. 과거에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종이에 쓰는 방법이 문자를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학문을 숭상하고 글짓기가 중시된 유교사회에서 이들 문방구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호조에 내린 지침을 새긴 현판은,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호조에 영조(재위 1724~1776)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조세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여 힘을 축적하라'는 뜻이다.
전시실 입구에 과하게 아름다운 스팸프를 찍는 스탬프 존이 있는데 스탬프 잉크가 말라서...관리가 아쉬웠다.
다음 전시실로 이동하는 복도에 '열린수장고'가 있다.
내부 풍경은 내가 기대한 그 '수장고'가 아니었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전시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왕실의례' 전시실.
<원자의 탄생과 태의 봉안> 조선 왕실에서는 왕위를 계승할 원자나 원손이 태어나면 그 탄생을 알리는 탄생반포誕生頒를 하고, 탄생 3일째에 원자의 탄생을 종묘와 사직에 알리는 고사묘告社廟를 지내 탄생 축하에도 예를 다했다. 왕실에서 태어난 아이의 태는 길지吉地에 태실胎室을 조성해 묻었는데 특히 원자나 원손은 길지 중에서도 1등지에 태실을 만들었다.
태종, 성종, 숙종, 순조의 태항아리.
<연輦> 대비, 왕,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이 행차할 때 탔던 정식 가마이다.
'궁중 악기'
종묘 제향을 위한 그릇과 제기들.
제기는 종묘에서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바치는데 사용한 그릇으로, 제기의 형식은 역대 예제를 참고하여 법식을 정해 저상을 모시는데 잘못이나 모자람이 없도록 하였다. 제기는 낡거나 파손되어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땅에 묻거나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신실 밖에 놓이는 제례 때 물과 술을 올리는 준소상.
종묘 신실 내부에 차려진 신실 제상.
종묘 제향은 짐승의 고기와 피를 바치는 '혈식血食'의 제사로, 소.양.돼지가 중심 제물(희생犧牲)이었다. 희생으로 쓰이는 가축은 그 목적을 위해 특별히 정결하게 키운 것으로 제사상에는 희생의 털과 피, 생고기와 삶은 고기, 고기를 삶은 국물을 올렸다.희생 외에도 기장과 수수 등의 곡식, 땅과 물에서 난 다양한 산물로 만든 각종 음식을 차렸다.
<국왕의 장례 절차>
<가교駕僑> 왕, 왕세자 혹은 왕실 어른이 장거리 행차 때 탔던 가마이다. 정조 대에 행한 화성 행차 때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탔던 가교가 이와 유사한 형태였다.
'과학문화'
<혼천의> 천체의 운행을 나타내고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의기.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은, 북극성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뭇 별들이 거기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論語)
조선 국왕의 통치와 천문: 고대부터 국왕은 하늘의 뜻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졌다. 조선이 통치 이념으로 삼은 유교에서도 하늘을 살펴 백성들에게 절기를 바르게 알려주는 관상수시觀象授時를 국왕의 임무 가운데 으뜸으로 삼았다. 조선은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과 백성을 섬기는 '애민愛民'을 국가 통치 이념의 큰 기둥으로 삼았고, 천문은 국왕이 몸소 이를 실천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창덕궁 측우대> 비가 내린 양을 재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1441년(세종23) 측우기와 측우대를 처음 만들고
전국에 설치하여 강수량 측정을 제도화 하였다.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6) 제작하여 창덕궁 이문원(규장각 부속건물) 앞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네 면에는 측우기를 세운 연원과 내력을 새겼다.
<일성정시의> 1437년(세종19) 세종의 명으로 제작한 시계로,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측해 시간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앙부일구> 해의 위치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의 위치를 읽어 시각과 절기까지 알 수 있도록 만든 시계이다.
세종 대에는 앙부일구를 오늘날 광화문과 종묘 인근 등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곳에 설치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했다. 시각의 이름을 글자가 아닌 각각이 상징하는 동물 모양으로 새겨 글을 모르는 백성도 쉽게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앙부일구>
해시계 <소일영>을 올린 받침대와 주요 부품인 백각환.
<물시계> 그릇에 일정한 속도로 흘러든 물의 양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물시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것으로 '자격루'가 있다. 1434년(세종16)에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이 만들어 경복궁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처음 설치하였다.
해시계나 별시계와 달리 밤과 낮, 맑은 날과 흐린 날에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어서 표중시계로 쓰였다. 일정한 시간 마다 자격루에서 울리는 북과 종소리는 광화문을 거쳐 궁궐 밖 종루에 전달되어 도성 전체에 시간을 알렸다.
<자격루 종>
계절 마다 변화하는 별자리들은 절기의 변화를 파악하는 기준이 되었다. 별자리를 관측하고 파악하는 것은 천문 현상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늘은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의 전체 모습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구형의 하늘을 가상으로 만들고 그 위에 별자리의 위치를 표현한 <천구의>와
평면에 하늘을 원형으로 묘사하고 별자리를 그린 <천문도>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지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구본을 만들거나 지도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평혼의>는 19세기 박도수가 만든 것으로 판을 앞 뒤로 돌리면 남극과 북극의 하늘과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평면화 된 <천구의>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 있는 별자리의 배열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별을 관측하거나 시간을 파악할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문도天文圖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이 있는 전시실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탁본이나 목판본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원형은 바로 태조 대에 만들어진 각석과 숙종 대에 이를 다시 만든 복사본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태조 즉위 초인 1395년에 조선 건국 이전부터 전해지던 천문도 각석의 탁본을 구해 별자리 위치를 보정한 후에 완성하였다. 태조는 이를 통해 천문을 살피고 시간의 흐름을 파악해 백성에게 알리는 국왕의 의무를 실현하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천문도에는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원에는 1년 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바깥쪽에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별자리가 자리하고 있다. 별의 크기와 부피를 다르게 새겨 밝기 차이를 나타내기도 했으며 별자리와 더불어 천문도를 만든 경위, 만든 사람들, 당시의 천문 이론 등이 새겨져 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표면이 닳고 별자리를 알아보기 힘들어지자 1687년에 다른 돌에 그대로 옮겨 새겼다. 과학문화전시실에서는 매 15분 마다 밝음과 양기의 근원인 태양, 계절별 별자리, 대표 별자리 28수 등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이 담고있는 다양한 내용의 영상를 상영하고 있다.
순정효황후가 타던 어가를 복원 전시 중이라 바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준비 중인 2층 기획전시실 '궁중음식'
이제사 '국립고궁박물관'을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백 번 책으로 보는 것 보다 박물관에 한 번 와야할 이유를 실감했다.
'About Others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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