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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묘허큰스님 을사년 일년기도 입재 법문-- 백학명선사 신년가 본문

방곡사 가는 날

묘허큰스님 을사년 일년기도 입재 법문-- 백학명선사 신년가

lotusgm 2025. 2. 19. 09:25

 

 

 

 

 

 

 

허망하고 무상하다..인간 세월 빠르도다. 정든 해는 간 곳 없고, 새해 다시 돌아왔네..

묵은 해는 가도 말고.. 새해 다시 오도 마소..

어린 아이 소년되고..소년되면 청년되고,청년되면 노인되고,노인되면 될 것 없어 멀고 먼길 가고마네.

새해부터 나아가세...도끼 들고 산에 들며 덤불쳐서 개량하고,

괭이 들고 돌밭 갈면 황무지가 옥토된다. 

우리 밭에 보리 싹은 눈 속에도 푸르르고, 우리 새암 물줄기는 소리치고 솟아난다.

부질없이 나아가면 새천지 아니볼까...정신있는 우리 사람 사람 중에 사람되세...하시더라.

나...무...아..미..타...불

 

전라도에 가면 전라남북도를 가로 지르는 산이 하나 있는데 바로 내장산입니다. 산 하나가 능선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백학산이고 북쪽으로는 내장산인데, 내장산이 있는 곳은 전라북도 정읍이고, 백학산이 있는 곳은 전라남도 장성입니다. 내장사는 (도가 다르기 때문에)백양사 말사가 아니고 선운사 말사입니다. 내장사 뒷산의 산내 암자 벽련암에 오래 주석하셨고 내장사 조실로도 계셨던 백학명스님은 근세에 입적을 가장 잘 하신 스님 중에 한 분입니다. 입적하시던 날에도 아침 공양을 드시면서 주지스님을 불러서 '오늘 원주스님 데리고 내장 장에 가서 콩나물 두어통 사고,광목 두어필 끊고, 짚세기 50켤레 사오라' 그래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자면 전부가 장사치를 덕목이라,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면 '스님~ 우리 절에 노비구도 없고 병든 사람도 없고 초상도 안 났는데 왜 초상 장을 봐오라 하십니까' 묻겠지만 옛날에는 어른스님 말씀이니 묻지도 않고 장을 보러 나갔어요. 

주지스님한테 원주스님과 부목을 데리고 장을 보러 오라고 보내놓고, 당신 시자에게는 가마솥에 물을 좀 데워달라고 해서 목욕재계 후에 옷을 갈아 입고 시자가 갈아주는 먹으로 달마 몇 폭 치고 앉아서 입적하셨어요. 주지스님이 장에 다녀오는 동안 조실스님이 입적하셨으니 장 봐온 물건들로 초상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백학명스님이 입적하신 전 날의 재야(올 해 입적하시면 작년 섣달 그믐날 저녁)에 당신 홀로 지은 글로, 바로 '신년가' 입니다.

 

석문의범에 기록되어 있는 가사인데, 내가 열여덟 아홉살 때 노장스님 한 분이 염불 가르치기 위해서 오셨어. 그 때 강사셨던 고봉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일대 선비인데, 해인사에 와서 출가를 하면서 당신 스승되시는 임환경스님에게 (스님 노릇하는 게 무엇입니까?) 물으니 (너는 무엇이다 싶으냐?) (목탁치고 염불하는 것이 중노릇하는 거라면 내가 출가를 하지 않을 것이고, 참중노릇 하는 것이 그것 말고도 있다면 출가하겠습니다) (그래 목탁치고 염불하는 것은 탁잣(卓子)밥 빌어 먹는 거고, 중도 육체가 있기 때문에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살고 하니 부처님 탁잣밥 빌어 먹으려면 마지 올릴 줄도 알아야 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염불은 해야한다. 하지만 그것 아니라도 여러가지 화두를 참고해 도를 깨닫는 참선도 있고, 염불도 의식염불 말고 염불수행도 있고, 주력 수행,간경 수행도 있다) (그러면 스님께서 제게 목탁치라시면 절대로 스님 안 하겠습니다) ( 그래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한테 목탁치라고 안 할터이니 중노릇 잘해라)그런데 그 양반(고봉스님)이 마을에서 선비였으니 글 보는 습이 있어 절에 와서도 경을 봐서 강사가 되었어요. 그분이 항상 하는 얘기가 '내가 임환경스님한테 염불 안한다고 하고 스님이 되었는데, 염불 안하는 것이 염불 하면서 중노릇하기 보다 더 힘들더라' 그래서 당신 밑에서 글보는 사람들은 마지막 졸업반이 되면 염불 잘하는 노장님을 모셔다가 꼭 염불의식(북,태징)을 익히도록 해서 졸업을 시켰습니다. 

 

백학명스님께서 입적하실적에 묵은 해에서 새 해를 맞이하면서 읊어 놓은 한글 가사이기 때문에 '신년가'라 그럽니다. 

'허망하고 무상하다'...여러분 살아 온 거 생각해 보면 그렇지요? '인간 세월 빠르더라'...내가 스님 생활이 60년이 넘고 두어 해 있으면 해놓은 거 아무 것도 없이 70년이라요. 그런데 가장 즐겁고 편안하고 아무 생각없이 자유롭게 사는 데가 지금 살고있는 '증곡토굴'인데, 얽메이지 아니하고 스님도 속인도 아니게 자유롭게 살려고 '曾谷'이라고 했어. 스님을 가리키는 중僧에서 사람人을 빼버리면 일찍曾, 세속俗에서 人변을 빼면 골谷, 그래서 스님도 아니지만 머리 깎고 법복을 입었으니 세속사람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스님 되어서 70여 년, 세속으로 80년 넘어 살아 봐도 꿈결같아, 허망하고 무상합니다.

정든 해는 간 곳없고...한 해 정들여 놓으면 섣달 그믐되면 그 해는 간 곳없고 새해 다시 돌아왔네. 어린 아이는 소년되고...태어나면 언젠가 소년이 돼요. 소년되면 청년되고,청년되고 나면 노인돼요. 노인되고 나면 더 될 것도 없어 멀고 먼 길 가고 마네....죽는다 그 말이야. 저승길이 얼마나 먼지도 모르는데 눈 감으면 그 자리기 때문에 멀지도 않아.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엄청 먼 것처럼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는 거여. 정신있는 우리 사람, 사람 중에 사람되자...어떻게 사람 노릇하고 사느냐? 도끼들고 산에 들면 덤불쳐서 개량하고...참으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소리여,도끼는 진리,부처님 가르침,불법입니다. 산은 인인개개인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사상(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도끼들고 산에 들면...진리를 가지고 마음 가운데 들어가면, 그 말입니다.

그럼 사상이 뭐냐?<아상>은 나라는 생각, 나라야 된다는 생각,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내가 최고라는 생각이 전부 '아상'입니다. <인상>은 남이라는 생각, 상대라는 생각, 너라는 마음입니다. 중생의 한계는 어디에 두느냐? 육체는 있는데 영체가 없으면 송장, 영체는 있는데 육체를 잃어 버리면 귀신, 영육이 물질적인 육체 이 몸뚱아리 와 정신적인 영체인 내 원래 면목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영육이 여의는 순간,물질적인 육체에서 정신적인 영체가 이탈하고 떠나가는 순간, 육체 생명 끝나요. 그런데 영육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심호흡을 하고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민물 짐승 개미 한마리까지도 모두 중생계에 속해요.사람만 중생이 아니고,중생이 깨달으면 보살이야. 

여러분 조금전에도 반야심경을 하데요? 반야심경에 보면 '보리살타'란 말이 나와요. 그것을 줄이면 '보살'인데 '보리'라는 말은 깨달음(覺), 살타는 중생이란 말이야. 중생이 깨달으면 '보살'이고 깨닫지 못하면 '중생'이야. 그래서 '보리살타'는 깨달은 중생, 깨달은 분, 즉 보살이야. 그래서 보살도를 성취해야 되는데 보살도를 이루지 못하면 중생, 중생의 생명의 본질은 평등한데 생명의 본질 자체를 차별하는 마음,그것이 <중생상>입니다. 중생의 생명의 본질은 평등해요. 업이 다르기 때문에 덮어쓰고 있는 껍데기, 옷만 다를 뿐이지. 육체 이거 옷입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것은 육체의 옷이고, 육체는 나의 본래 면목 참 나, 나의 주인공이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과보를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올적에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육체를 부모님에게 얻어서 내 것인줄 알고 사용하고 있지만 '내 것'이지 '난' 아니거든? '내 것'을 줘 버리면 '당신 거'야 더이상 '내 것'이 아니고...부모님한테서 내가 얻었으니 '내 것'이지만 '나'로 생각하면 안돼. 육체는 지수화풍 4대 물질로 이루어진 유형, 형상이 있는 색신이기 때문에 생자는 필멸하게 되어 있어. 언제든 우리는 죽게 되어 있고, 죽어서 가야 되잖아요.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고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거여. 그 이전에 영육이 공존하고 있는 동안에 한번 깨달아 보자는 것이 불교야. 생사윤회를 면해보자는 것이 불교이고, 생사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 보자는 것이 불교야. 그래서 알아 버리면 '보살'이고 알지 못하면 '중생'이지. 그런데 업이 달라서 겉모양 덮어쓰고 있는 육체만 다를 뿐이지 생명의 본질은 평등한데 생명의 본질을 차별하는 마음이 <중생상>이고, 마지막으로 본무생사한데 분명생사한 줄 알고(진리를 알면 생사가 없어요) 생사에 얶매여서 죽지 않고 살려고 발버둥치고 하루 일초일각도 더 살고 싶은 마음, 이것이 <수자상> 입니다.  그래서 중생과 깨달은 분의 차이는 육체적으로는 분명생사한데 본무생사한 도리를 바로 보고 깨달은 분이 각자(覺者)라면, 진리를 알고 보면 본래 생사가 없는데 분명생사한 줄 알고 생사에 끄달려서 죽지않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중생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사상산에 들어가서 덤불쳐서 개량하자...덤불은 전라도 사투리인데 덩쿨,천사람 만분별이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덤불에 비유했어요. 우리가 수행한다는 것이 딴 것이 아니고 나와 번뇌가 싸우는 작업, 한 생각 일어나면 번뇌고 한 생각 일어나면 망상인데 이 것을 내 생각인줄 알고 생각의 앞잡이가 되어 업만 짓고 생활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야. 그것이 전부 번뇌고, 내 자성을 증득하고 깨닫는데 장애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쳐없애야 됩니다. 그래서 도끼들고 산에 들면 덤불쳐서 개량하고...진리를 가지고 사상산에 들어가 번뇌를 쳐부수어 깨달아 보자 그 말이야.그래도 중생들이 또 못 알아 들을까봐 한마디 더 일러놨어요. 괭이들고 돌밭 파면 황무지가 옥토된다...괭이는 도끼와 같이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지고, 돌은 번뇌 망상,밭은 우리 심전(心田), 본래 우리 마음은 옥토인데 그 번뇌 망상의 찌꺼기가 섞여있어 우리 마음이 황무지야. 황무지를 개량해서 옥토로 만들자는 것이 불교니 알고보면 불교가 참 멋드러졌잖아. 그래도 또 못알아 들을까봐 한번 더 일러놨어요. 우리 밭(인인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전)에 보리 싹, 보리는 깨달음,싹은 불성의 종자에 비유했습니다. 눈(번뇌) 속에,우리의 본래 모습 자성이 번뇌 속에 묻혀있어.

여러분이 왜 견성하지 못하느냐? 한 생각 일어나면 번뇌, 한 생각 일어나면 망상인데 그것을 내 생각으로 알고 생각의 앞잡이가 되어 생활하다 보니 번뇌의 구름이 자성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를 않아서 볼 수가 없고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으니 중생에 머무를 수 밖에 없어요.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보리 싹이 눈 속에 덮혀서 파랗게 살아 있듯이 우리의 마음 번뇌 속에도 우리의 본래 모습,자성, 참 나 주인공은 성성적적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거야. 우리 새암 물줄기는 소리치고 솟아난다...새암(지혜의 원천)에서 지혜가 소리치고 항상 솟아나고 있는데 그것을 구름이 덮고 있으면 안 돼지. 부질없이 나아가면...어영부영 왔다갔다 세월만 보내지 말고 꾸준히 부지런히 쉬지말고 나아가면.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올 날이 자꾸 오면 올 날이 적어지고(日日日來來一小),지나 간 날은 두번 다시 오지 않고 온 날은 가고 맙니다 (去日不來來一去). 가는 날은 절대로 그냥 가지않고 우리 인생을 빼앗아 도망가요. 오는 날은 그냥 오지않고 백발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오는데 그 선물은 안 받을 수도 없어요. 그러다가 올 날 다 와버리면 금쪽 같은 이 내 몸과 틀림없는 이 내 마음이 이별하는 순간, 그 때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거야. 그러나 지혜의 원천에서 솟아나는 물줄기가 쉬지않고 흘러갈 수 있도록 도랑을 쳐줘야 돼요. 이 것이 불교 수행 공부야. 막힌 도랑 쳐서 그 물줄기 안 끊어지게 흘러 갈 수 있도록 해주면 새천지 아니볼까. 흘러가는 물이 가다보면 모습도 다르고 맛도 다른 새천지 바다(覺海)로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정신있는 우리 사람, 사람 중에 사람되자...사람 중에 사람이 되어야 돼요.(참 사람)

백양사 방장을 하셨고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던 이서옹큰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참사람 운동'을 하다 가셨어요.' 사람人자 다섯개 중에 마지막 사람이 참사람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스님이 했던 말인데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해야 참사람이다' 그러면 이 지구상에는 참사람은 부처 한사람 뿐이라는 거야. 부처님 제자가 돼서 부처 닮아서 우리도 부처님 같이 참사람이 한번 되어보자. 사람 중에 사람되세...학명스님은 사람 중에 으뜸가는 '참사람'이 되자 그 말입니다. 참 멋드러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친견도 못했지만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우리 시대 바로 앞의 시대 스님인데 그 스님에 대한 일화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한꺼번에 다 고치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하나 고쳐가면서 사는 것이 중생이고, 하나하나 고쳐가며 살도록 고치는 방법이 불법이고, 고칠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자예요. 

여러분들도 새해를 맞이해서 다른 사람 말할 것 없고 내가 나를 위해서,나를 돌이켜 비추어 봐가면서 잘못된 것이 있거들랑 오늘 잘못은 내일까지 가져가지 말고,오늘 것은 오늘 다 풀고 가야 됩니다. 

내가 젊은 시절에 그렇게 살겠다고,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잘 쓰는 스님 중에 우리 상노스님인 백용성스님의 제자 중에 한분으로, (수법제자는 동산노스님이고) 그 다음에 왕희지 필체를 쓰시는 동헌스님이라고 계셨는데 화엄사 문중을 형성하신 그 어른이 천불전에 계실적에 내가 가서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글을 부탁해서 써왔습니다. 그것을 항상 하루하루 내가 나를 돌이켜 비추어 보는 그런 스님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신흥사에 걸어 놓았었습니다. "회광반조"가 무슨 뜻이냐 하면, 매일매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가 나를 돌이켜 비추어 보는 생활을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금년부터 하루를 그냥 보내지 말고 잠자리에 들적에 오늘 하루의 내 생활을 비춰보라는 거야. 잘못 된 것이 있거들랑 간절하게 뉘우치고, 잘된 것이 있거들랑 내가 나를 칭찬하고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익혀주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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