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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묘허큰스님 백령사 참포주 철야기도 법문 본문

방곡사 가는 날

묘허큰스님 백령사 참포주 철야기도 법문

lotusgm 2013. 8. 5. 14:44

 

 

                                                                                                                                                                         - 방곡사 수곽 -

 

불교에서는 교학적으로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을 말할 때는 대표적인 삼신불을 이야기 합니다.

삼신불을 이야기할 때는 법신,보신,화신 이렇게 삼신이라 그래요. 법신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말하고

보신은 원만보신 노사나불을 말하고,화신은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을 말하고 ..법보화 삼신이라 그래요.

그런데 본분소식에 들어가면 보신도 화신도 비진이라..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의 대상으로

삼신불에게 귀의하고 삼신불을 일컫고 삼신불에게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이 아니고 비진이다

아닐비 非 참진 眞..참이 아니다. 법신이 청정하여 광무변하다 법신만이 밝고 깨끗하고 넓고 광대해서 참부처이다.

보신과 화신은 왜 부처가 아니냐. 청강에 유수하면 청강월이요,일천강에 물이 있으면 달그림자가 일천 강물에 똑같이

하나의 달로 비치고 그런데 물에 비친 달은 그림자에 불과하지 참 달은 아니다. 물은 달그림자가 비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용만 하지  물이 달수는 없거든..또 달에 비친 그림자도 참 달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의 달이 비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은 보(도울補)신이라면 물에 나타난 그림자는 화신이다. 만리무운 하면..만리에 구름이 없으면 만리가 그대로 하나의

하늘이다.그래서 물은 보신이고..물이 있어야 그림자가 비치지 물이 없으면 그림자가 안비치거든..물이 보신이라면

물에 나타나는 그림자는 화신이다. 물도 참 달은 아니고 물에 비친 그림자도 참 달은 아니야. 그러니까

보신과 화신은 역시 그와 같더라..그래서 우리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하는데 그냥 말이 '석가모니부처님'이지

'석가모니'란 이름이 붙으면 이미 부처가 아니다. 석가족의 정반왕을 아버지로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태어난 지수화풍

4대 물질의 요소로 이루어진 육체의 이름이지 그 이름이 부처일 수는 없지. '석가모니'란 이름이 붙은 싯달타는 부처가 아니야.

그럼 부처는 뭐냐..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자리 부처님께서 보고 느끼고 깨달으신 그자리..깨달음이 부처님이지.

깨달은 그자리 바로 그것이 법신이야.

역대조사가 깨달은 그자리도 똑같고,앞으로 우리가 깨달아야 될 자리도 똑같고 깨달음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야.

깨달음은 하나지 둘은 아니야.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위해서는 깨달을 수 있는 육체도 필요한 거야. 육체는 도를 닦을 때는

도 닦는 기구요 도를 깨닫고 나면 깨달은 도를 담아서 세상 중생에게 펴 줄 수 있는 도기지..도는 아니야.

'석가모니'라는 이름붙은 그 육체를 가지도 도를 닦고 깨달은 부처님의 법체요 부처님의 육신이지 부처는 아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그자리..바로 법신이다. 법신은 뭐냐..우주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생명의 본질이다.

하나의 생명의 본질이 중생들의 업에 따라 인인개개인의 원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자성이다.

스스로의 성품.. 자성이다. 우리가 이렇게 밤을 세워 공부하고 철야정진을 하는 것은 내라는 존재생명의 본질을

언젠가는 바로보고 바로 깨달아 법신에 계합을 하자.그래서개별적인 자성을 증득해서 총괄적인 법신의 하나가 되자.

본래 하나인 그 자리를 바로 알고 본래 하나인 그 자리로 계향하자.

 

천강유수하면 천강월이라..물은 물이로되 달그림자가 맑게 비칠 수 없는 물이 있어..그건 무슨 물일꼬?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굽이치는 흙탕물에는 아무리 밝은 보름달도 그림자를 비칠 수가 없어요.

그럼 그 물이라고 영원히 물그림자가 비칠 수 없는 것이 아니야. 섞여있던 모래찌꺼기가 가라앉고 가라앉아

맑아져서 가을못과 같이 고요하게 되면 달그림자가 비칠 때도 똑 같이 비칩니다. 이건 뭐를 이야기 하느냐.

우리도 본래는 부처가 깨달았던 그 자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의 종자를 인인개개인 다 가지고있어요.

그것을 망각하고,잊어버리고,놔버리고,알려고도 생각하지 않고,찾을려고도 생각하지 않고..한생각 일어나면 번뇌고

한생각 일어나면 망상인데 그것을 내 생각으로 알고 망념의 앞잡이 노릇하느라 업만 짓고 생활하고 있다보니까

망념의 모래찌꺼기, 번뇌의 탁한 물에 있기때문에 자성을 바로 비춰볼 수 없어요. 그런가하면 번뇌 망상만

우글거리는 게 아니라 생각이 헐떡거리고 있어.. 굽이치는 물과 같이..천사랑 만분별고 온갖 분노 밉고 고운 생각으로..

그걸 놔야 돼. 그걸 놓고 가라앉히는 방법은 여럿이서 참포주를 빨리하다보면 안놓치고 따라가려고

거기에만 몰두하다보면 딴생각이 일어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구족수화길상광명 대기명 총지장구'

마지막 찬에 보면 '파번뇌적 즉설주왈'이라고..우리가 불교를 믿고 공부하고 수행해서 목표가 깨달음에 있어야하는데

깨달음의 가장 큰 적이 뭐냐하면 번뇌거든..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가 보살도를 성취하기 이전에 소승불교에서 닦아가는

4단계(사다함과,수다원과,아나함과,아라한과)중 마지막 구경의 단계인 아라한과의 아는 無고 나한은 敵 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무적,적이 없다 혹은 살적이라고도 하는데, 상대적인 적이 아니고 내적인 번뇌의 적을 다 쳐부수고

가라앉히고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라한은 번뇌의 누가 다 되었다. 찬의 끝에 '파번뇌적 즉설주왈'

번뇌의 도적을 쳐부수는 몫을 하옵니다 하고 곧 주를 설하여 가로되 '츰부츰부츰츰부...'

우리도 오늘 밤에 번뇌의 도적을 좀 쳐부셔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부처님 되는 겁니다.. 아라한도 될 수 있고..

파번뇌적만 해버리면 아라한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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